2010년 10월 6일 수요일

몸에 대한 단상

몇해 전 몸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들을 짧막하게 정리한 칼럼을 연재한 적이 있다. 이 글은 그것을 조금씩 정리하여 엮은 것이다. 이글을 쓰게 된 것은 '주체'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다. 주체에 대한 이해는 앞서 언급한 사회성(Sociality)을 이해하기 위한 단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주체의 행위와 의미화 과정 등에 대한 생각은 주체가 놓여 있는 맥락과 관계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할 것이다.
우리는 흔히 알고 있는 바를 글로 쓴다고 생각하지만, 역으로 글쓰기는 생각을 정리하는 효과적인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글쓰기는 오히려 나의 무지를 좀더 선명하게 그려내기 위한 노력이라 할 수 있다.

몸에 대한 짧은 이야기

#1
대학시절 처음으로 원어민 영어강사가 진행하는 영어회화수업을 청강하면서 적잖게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몇 가지 단어를 근거로 눈치껏 그 강사가 하는 말을 헤아릴 수는 있었지만 나의 의사를 영어로 표현하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혹시나 나에게 질문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얇은 책속에 얼굴을 묻고 그 외국인 강사의 눈길을 피하려했었다. 하지만 그 강사는 짓궂게도 애써 외면하려는 학생들만을 골라 질문공세를 퍼붓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답변하기 위해 엉터리 영어에다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진땀을 흘리곤 했었다. 더듬거리는 말투 못지않게 엉성한 몸놀림이 시작될 때면 그 강사는 이런 말을 했다.
 
“No Korean, No Mime!!”
 
그렇다. 이 영어강좌에서는 한국말 사용과 몸짓으로 무언가를 설명하려는 시도를 엄격하게 금하고 있었다. “Only English!” 영어만이 유일하게 허용된 언어였다. 겪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나처럼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엉터리 수화(手話)와 엉거주춤한 율동이 저절로 시작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신기한 일이지만 이런 몸짓언어로 부족한 영어실력을 대신하려는 것은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학생들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2
성직자와 시민들이 주축이 되었던 ‘새만금 살리기’캠페인 이후로 ‘삼보일배(三步一拜)’가 하나의 시위문화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두 달이 넘는 시간동안 부안에서 서울까지, 그냥 걷기도 힘든 거리인 305㎞를 세 걸음에 한 번씩 절을 하며 걷는 삼보일배의 행렬은 한국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던져 주었다. 땀과 피가 얼룩진삼보일배의 힘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이었을까? 그렇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행렬은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절실함 자체였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게 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말을 통해 의사를 소통한다는 점이다. 말은 문자로 기록되고 활자를 통해 퍼져나가면서 인류가 문명을 이루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말에 모든 것을 담을 수는 없다. 말이 지닐 수밖에 없는 의미의 빈틈을 대신 하는 것이 바로 표정이나 제스처와 같은 ‘몸짓’일 것이다. 말이 유용한 것임에는 틀림 없지만 ‘몸짓’만큼 풍부하지는 못하다. 때때로 육체를 갖지 않은 말은 그저 공허할 뿐이다.

#3
미술대학에 재학 중이던 어느 여름, 대형 강당을 개조하여 만든 스튜디오를 몇몇 동료들과 개인 작업실로 꾸미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방학을 맞아 학생들이 다 빠져나간 학교는 을씨년스럽게 남겨진 폐광 같았다. 잡동사니들이 바닥에 뒹굴고 있었고, 길게 늘어선 복도는 음침한 입을 벌린 채 잠든 모습이었다. 그 풍경은 낯설고 기괴하기까지 했다. 마치 현대미술이라는 거대한 괴물이 성장을 마치고 떠난 빈 둥지처럼 황량한 폐허를 보는 듯 했다.
 
먼지와 땀이 범벅이 되어 쓰레기더미를 옮기고 있었다. 문득 종아리 뒷부분에 둔탁한 통증이 느껴져 반사적으로 그곳으로 눈을 돌렸다. 무릎 아래정도 높이의 낡은 탁자 위에  유리조각이 놓여있었다. 나의 종아리가 그것을 스치면서 살갗이 찢어진 것이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멈춘 듯 고요한 정적이 잠시 스쳐갔다.
 
놀라운 것은 통증이 아니라, 처참하게 드러난 속살이었다. 나는 통증에 고통스럽기보다는 오히려 무슨 감춰진 비밀이라도 발견한 듯 이리저리 상처부위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어떤 깨달음이 나를 찾아왔다. 그것은 ‘피를 흘리는 살’이 ‘나’라는 인식이었다.

#4

그날 우연히 경험한 사고는 나에게 복잡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몸’은 무엇일까? 과연 그것은 ‘나’라는 정신적 주체를 둘러싸고 있는 껍질에 불과할까? 육체가 사라지더라도 ‘나’라는 자아는 영원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질문은 마모루 오시이(Mamoru Oshii)감독의 애니메이션 걸작 「공각기동대(원제:Ghost in the Shell)」가 던지는 의문과 오버랩되었다.

「공각기동대」는 모토코 소령과 네트워크 속에서 자아를 인식하는 존재로 만들어진 인형사와의 갈등을 통해 주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은 영화「매트릭스」로 이어지면서 가상과 현실의 경계와 그 경계 속에서 표류하는 주체들을 더욱 구체화하게 된다. 이 두 영화는 주체를 무수한 경험과 이에 대한 기억의 총합으로 표현한다. 결국, 그 기억을 조작할 수 있다면 ‘나’라는 존재는 언제든지 사라질 수도 다시 탄생할 수도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서구의 문화적 배경에서 보자면 몸이란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제한적인 존재에 불과하다. 반면 정신 즉, 생각하는 주체로서의 정신은 몸이 사멸하는 순간 신의 영역에서 영원한 존재로 살게 된다. 그렇다면 몸은 그저 정교한 센서들과 동력장치로 이루어진 기계이거나 ‘나’라는 주체를 형성하기 위한 매개일 뿐인 것인가?

#5
몸이 그저 하찮은 물질적 존재라면 이성에 대한 몸의 복종을 강요하거나 영혼의 순결을 위해 자학에 가까운 금욕주의를 선택하는 것은 최고의 선(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몸에 행하는 본능적인 자기애(나르시시즘. Narcissism)를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몸에 대한 애착은 일상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나는 매일 아침 몸을 닦으며 몸의 변화를 살핀다. 검은 머릿결 사이에서 은백색으로 빛나는 새치를 살피며 고단한 하루를 생각하기도 하고, 늘어가는 뱃살을 보며 막연한 불안감을 갖기도 한다. 이렇게 일상은 몸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으로 채워지고 있다.
 
몸에 대한 관심은 더 나아가 무엇을 입을 것인지, 무엇을 신을 것인지, 무엇을 쓸 것인지의 고민과도 연결된다. 이쯤 되면 몸의 영역은 패션으로까지 확대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몸에 대한 관심은 또 무엇을 먹을 것인가, 무엇을 바를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의사결정에 있어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기도 한다. 몸에 대한 관심은 관심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연결되며 우리의 삶을 만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몸은 물리적인 실체일 뿐만 아니라, 자신을 표현하는 적극적인 수단이고 매개로서 일관된 정체성을 유지하며 자아를 실현하기 위한 물질적 토대이다. 어떠한 몸을 가질 것인가는 나의 정체성을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의 문제와도 연결되는 것이다. 1)

세계는 관조의 대상일까?

데이비드 호크니(Hockney,David)의 「니콜스 계곡(Nichols Canyon)」. 1980
“간이 콩알만해 졌다”라든가 “간담이 서늘하다”, “쓸개 빠진 놈”, “목 놓아 울다” 등등은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이다. 신체부위를 통해 심리적인 상태를 표현하는 말들은 이외에도 “피도 눈물도 없다”, “눈에 밟히다” 등 무수히 많다. 서양인들은 직관적인 느낌을 “창자의 감(gut feeling)”이라고 표현한다고 한다. 나는 어렸을 때 실제로 ‘마음’이라는 기관이 가슴 속에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무서운 것을 보면 가슴이 벌렁 벌렁하고, 꾸지람을 들으면 가슴에 옥죄는 느낌과 함께 눈물이 났기 때문이다. 과연 생각이나 심상작용과 같은 정신활동과 신체는 별개의 존재일까? (실제 이 부분은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새로운 논쟁이 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미술(美術)’이라는 영역에서는 사물을 보는 방식에 따라 ‘현실성(reality)’ 혹은 ‘사실성(reality)’이라는 문제와 맞닿게 된다. 사물에 대해 어떠한 시선을 갖는가는 결과적으로 ‘사실’에 대한 상이한 인식을 낳기 때문이다. 서양적 시각에서 제작된 풍경화는 일상적으로 쉽게 접할 수 있는 풍경사진을 닮아 있다. 여기에는 치밀하게 연구된 광학적 지식과 원근법의 원리가 녹아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메라의 등장이라는 문화사의 맥락은 서양 회화사(繪畫史)의 전개과정과 만나게 된다.

반면 동양적 시각에서 제작된 풍경은 인간적 경험에 충실한 면이 있다. 즉 사물의 인식에 있어서 개관적인 재현보다는 주관적 경험을 중시해 왔고 그림은 ‘사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그리는 것’으로 간주해 온 것이다. 이러한 시각적 차이는 우리의 몸을 정신활동과는 무관한 해부학적 대상으로 간주하는 서양적 관점이나, 몸을 경험이 축적된 고유한 인격의 부분으로 보는 인식의 차이와 맥을 같이 하기도 한다.

우리는 사물(혹은 세계)과 몸을 대하는 두 가지 태도가 공존하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어떠한 관점을 취하느냐의 문제는 각자가 처한 현실과 맥락에 따라 수시로 변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문제는 어느 것이 진실이냐를 놓고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시각적 차이를 인정하고 두 관점의 조화를 모색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세계와 몸: 혼돈에서 존재를 길러내다

수사(修辭)란 말이나 글을 좀 더 설득력 있게, 그리고 아름답게 꾸미기 위한 글쓰기의 기법을 의미한다. 연애편지야말로 온갖 수사법들이 총동원된 글이라 할 수 있다. 늦은 밤 깊은 감흥에 젖어 써내려가던 연애편지를 다음 날 아침 맑은 정신으로 다시 읽어보면 왜 그렇게 닭살이 돋고 쥐구멍을 찾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던지. 글쓰기에서 수사법은 맛깔을 내는 양념임에는 틀림없지만 너무 과용하는 것은 금물이다.
 
이러한 수사법을 사용한 시어에는 마음을 출렁이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보다는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 오오.”라는 김동명 시인의 시구는 관념적인 사랑의 개념을 ‘호수’로 형상화 하면서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랑인지를 느끼게 해준다. "어린 사슴처럼 민첩한 그대 눈동자(바이런의 「어떤 사람에게」)"를 본적이 있는가? 이러한 시구를 통해 독자는 무언가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는 미묘한 느낌, 그 선하고 선한 어떤 눈동자를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나는 이런 수사가 세계를 인식하는 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자, 이제 당신을 세상에 갓 태어난 아이라고 상상하면서 세상을 느껴보자. 물론, 실제 갓난아기의 감각은 오랜 시간 서서히 깨어나면서 세계를 인식한다. 새로운 감각을 익히는 과정에서 부모와의 교감은 아이에게 안정감을 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생물학적인 안전장치가 없다면 아이는 심각한 혼란과 불안, 두려움에 빠질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선천적인 맹인이 시각을 갖는 경우가 바로 이런 것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엄청나게 많은 시각정보를 접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일과 중에 기억할 수 있는 시각 경험은 단 몇 가지에 불과하다. 이것은 우리가 모든 시각적 자극을 인지하지 않고 필요한 것만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 능력은 성장 과정에서 학습을 통해 서서히 형성되는 것이라고 한다. 선천적 맹인의 경우 시각정보를 걸러내는 능력을 학습하지 않았기 때문에 갑자기 시각을 갖게 되었을 때 매우 혼란스러워하거나 신체적인 부작용을 겪기도 한다.

일상에서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겠지만, 세상은 매우 혼란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을 인식하며 나름의 세계를 만들어간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 것일까? 그것은 몸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몸은 세계를 인식하는 기관이다. 그리고 혼돈스러운 자연 속에서 나라는 동일성을 유지하는 물리적 토대이다.

수사법 가운데 의인법은 우리의 신체가 바로 세계를 인식하는 기관임을 시사해준다. 의인법(擬人法)이란 사물이나 추상개념을 인간인 것처럼 표현하는 수사적 방법으로 인간이 아닌 생물이나 무생물, 그리고 추상적인 관념까지도 인간 또는 인간의 행위로 표현하는 방식을 말한다. 인류가 자연으로부터 처음 분화하였을 때 그들은 변화무쌍한 자연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자신들의 몸에 빗대어 그것을 이해하고 설명하려 했을 것이다. 이런 점은 아이들의 표현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아이들은 비가 오는 것을 ‘하늘이 운다’라고 표현하거나, 가지가 하늘로 뻗은 나무를 보고 ‘손을 치켜들고 있다’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 또한, 전적으로 스스로 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가장 원초적인 사회인 가족, 특히 부모와의 공감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을 배워간다.
 
우리는 신화나 설화 속에서 인간과 같은 존재로 묘사된 온갖 알레고리(우의,寓意)들을 볼 수 있다. 가장 좋은 예가 그리스·로마 신화일 것이다. 아름다움의 신 아프로디테, 사랑과 애욕의 신 에로스, 태양의 신으로 이성과 질서를 상징하는 아폴로 등등.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은 모두 인간의 모습을 하고 인간적인 정서를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다투고 사랑하는 등과 같은, 마치 이런 신들 하나하나가 복합적인 특성을 지닌 인간의 심성을 묘사한 것처럼 인간의 내면을 닮아있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

건축용어에 모듈(module)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고대 그리스·로마의 건축에서 각 부분의 길이와 비율이 이상적인 것을 일컫는 모듈러스(modulus)를 어원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모듈은 르코르뷔지에(Le Corbusier 1887~1965)라는 건축가에 의해서 건축설계의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흔히 ‘손을 올린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 모듈러(moduler)가 그것인데 이는 인체를 황금비로 분석한 인체비례이다.2)

인체비례를 모범형으로 간주했던 사례는 기원전으로도 소급될 수 있다. 기원전 1세기경에 활동한 로마 건축가인 비트루비우스는 신전 건축의 규준을 설명하는 기록에서 ‘팔과 다리를 뻗으면 기하학적 형태인 정방형과 원에 들어맞는다’는 주장과 함께 ‘인체비례를 모범형’이라고 했다. 이후 르네상스시대에 들어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를 바탕으로 ‘비트루비우스적 인간’이라는 인간상을 그리기도 했다.

인간의 몸은 이상적인 모범형으로서 뿐만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사물의 길이와 양을 측정하는 기준으로서 활용되어 왔었다. 사물의 길이와 부피, 무게 등을 측정하는 기구를 총칭하여 도량형(度量衡. weights and measures)이라고 하는데, 정밀한 측정기구가 없었던 과거에는 신체의 일부분이 기준이 되었다고 한다. 예를 들면, 길이로서는 손가락이나 손바닥의 길이로 ‘뼘’이, 부피로서는 한 줌, 두 줌과 같은 단위를 사용했을 것이다.

고대 이집트는 피라미드(BC 3000년 경)와 같은 경이로운 건축물을 많이 남겨 당시 고도의 도량형 기술이 사용되었을 것이란 추축을 가능하게 한다. 이때 길이의 단위로는 ‘큐빗’이라는 단위를 사용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중지 끝에서 팔꿈치까지의 길이를 의미한다. 고대 바빌로니아에서 유래된 큐빗은 다시 야드(yard)의 원형이 되었다. 고대 바빌로니아의 도량형은 이후 고대 로마나 중세 유럽에서 사용된 여러 도량형의 기원이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나라마다 각기 다른 도량형이나 다른 기준은 교역 등의 발전에 많은 어려움이 따랐고 때로는 왕실과 귀족들이 농민들을 착취하는 방법으로 도량형을 제멋대로 바꾸기도 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면서 혁명정부는 당시의 부패를 개혁하기 위해 영원히 변하지 않는 기준으로도량형을 고치기 위해 지구의 북극에서 남극까지의 거리인 자오선의 2천만분의 1을 단위로 정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탄생하게 된 것이 현재 우리가 편리하게 사용하고 있는 미터법이다. 하지만 영원히 바뀌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자오선의 측정에 오류가 발견되기도 하였고, 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지구의 모양도 조금씩 바뀐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인류는 사물을 판단하는 기준과 가치도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도 알게 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했다. 이것은 인식론에 있어서 경험주의를 강조한 주장이라고 한다. 좀 더 단순한 표현으로 바꾸자면 세계에 대한 인식은 각자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태양의 색깔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붉은 색이라는 사람, 노란 색이라는 사람, 심지어는 파란 색 등 각자가 느끼는 바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사물을 관찰하는 시간과 마음 상태 등에 따라서도 같은 사물은 다르게 인식될 수 있기 때문에 객관적인 규준이 따로 있다기보다는 각자가 고유한 척도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영원한 삶에 대한 욕망
 
지금 30대에서 40대에 이르는 연령이라면 <은하철도 999>라는 TV만화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을 것이다. 일요일 오전에 방영하던 <은하철도 999>는 달콤한 늦잠의 유혹을 뿌리치고 텔레비전 앞으로 향할 수밖에 없을 만큼 대단한 인기를 누렸었다. 이 만화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요 모티브는 ‘영원한 생명’이다.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는 ‘기계몸’을 얻기 위해 주인공들이 ‘은하기차’를 타고 우주여행을 하면서 겪게 되는 모험을 다루고 있다.

결국 목적지에 도착하지만 주인공은 기계인간보다는 다양한 감정을 느끼며 살아가는 평범한 인간으로 남는 것을 선택하게 되고, 다시 고향인 지구로 향하면서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은하철도 999>는 비록 아이들이 즐겨보던 만화영화였다고는 하지만 물질만능주의, 인간의 파괴적인 욕망 등 현대사회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주인공들이 펼쳐나가는 모험이야기에 융화시킴으로써 결코 가볍지 않은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어쩌면 ‘영원한 생명’은 <은하철도 999>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인간이 수많은 위협과 난관을 무릎 서고 추구하는 욕망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이미 은하기차를 타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달려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영원한 생명을 꿈꾸던 욕망의 흔적은 아주 먼 고대에서도 발견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고대 이집트의 미라(mummy)다. 이 미라는 사자(死者)가 저승에서 영생불사와 영화를 누리기를 바라는 믿음에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런 영원함에 대한 동경은 기하학을 발전시키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또한 최초로 중원을 평정한 진시황제 역시 불노장생을 준다는 약초를 찾기 위해 헛된 노력을 했었고, 자신의 거대한 무덤 속에 궁을 건설하고 호위병과 군마를 도용(陶俑)으로 만들어 저승에서도 황제의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했었다. 또한, 화약이 불노장생약을 만드는 중국의 연단술(煉丹術)에서 파생되었다는 이야기 역시 잘 알려진 것이다. 이렇듯 영원한 생명에 대한 도전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영원한 삶에 대한 욕망은 현대에 들어서면서 과학을 토대로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타임머신’이다. 인간이 생명을 연장하지 않더라도 타임머신을 이용해 시간을 초월하여 과거와 미래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다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 못지않은 파격적인 힘을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영원한 생명에 대한 꿈 역시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러한 욕망은 과학을 통해 더욱 현실적인 모습으로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냉동인간’이다. 냉동인간은 양서류와 파충류 등 몇몇 동물들의 동면에서 아이디어를 착안하고 있다. 현대의학으로 해결할 수 없는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을 냉동상태로 보존하여 의학이 발달한 미래에 다시 소생시켜 건강한 삶을 살게 한다는 것이다. 이미 냉동인간으로 보존되고 있는 사람은 수만 수백 명에 이른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을 소생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 확신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최근에는 줄기세포가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가능성으로 제기되기도 했다. 줄기세포를 이용해 원하는 장기를 만들 수 있다면 노쇠하고 병든 신체를 지속적으로 교체하면서 생명을 무한정 연장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과연 인간의 꿈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 아직은 이모든 것이 실현가능한가에 대해서는 불투명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좀 더 과학적인 설득력을 갖추고는 있지만 여전히 공상에 가까운 가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욕망과 집착이 뜻밖의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인간의 끝없는 욕심이 오늘의 문명을 이루게 한 동력이 되기도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러한 욕망에서 비롯된 문명이 지니는 야만성이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미라의 무덤을 만들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고된 노동에 시달려야 했었고, 진시황의 욕심으로 역시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거나 생매장되었으며, 연단술에서 비롯된 화약은 인명을 살상하는 무기로 만들어졌다. 냉동인간을 만들고 이를 보존하는 것 역시 막대한 비용을 필요로 하고(제로섬사회인 화폐경제체제에서 누군가의 부는 누군가의 가난을 전제한다), 배아줄기세포에 대한 연구는 여성들과 배아의 희생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은하철도999>에서 주인공들이 영원한 생명보다 평범한 인간으로 되돌아가기를 결정하게 되는 결말부분은 조금은 갑작스럽다는 느낌을 준다. 그렇기 때문에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라는 의문을 끊임없이 갖게 한다. 나름대로 결론을 생각해보면, 생명과 죽음 사이를 오가며 갖게 되는 기쁨과 슬픔, 욕망과 애착 등이 바로 삶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생명이 없는 죽음도, 죽음이 없는 생명도 ‘삶’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몸: 감추기와 드러내기

인간은 언제부터, 왜 옷을 입기 시작했을까? 성경의 창세기에는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의 금기였던 선악과를 먹고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로 보자면 최초로 옷을 입게 된 것은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옷은 이외에도 체온을 유지하고 피부를 보호하는 기능을 한다. 또한, 인간의 활동영역이 넓어지고 기술이 발달하면서 극한의 환경에서 적응할 수 있도록 옷의 기능과 종류는 더욱 다양해지고 있다. 잠수복은 해저에서 체온유지와 감압병(DCS decompression disease)을 방지할 수 있도록 해준다. 우주복은 극심한 고온과 저온을 견디면서 우주복 내부에 적절한 기압을 유지함으로써 신체를 보호해준다. 군복은 보호색과 특수한 재질을 이용해 최대한 몸을 은폐시킬 수 있는 기능을 갖추고 있다. 한편, 유니폼은 그 옷을 입는 사람들의 신분이나 사회적 역할, 소속 등을 나타내 줌으로써 개인의 개성보다는 조직의 특성을 드러내게 된다.

이처럼 옷은 몸을 보호하고 ‘가리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드러내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옷을 통해 드러나는 것으로는 우선 사회적 신분이라 할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는 복식(服飾)보다는 브랜드가 이러한 구별짓기를 대신하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연령과 직분에 따라 옷입는 방식이 다르고 경제적 계층에 따라 역시 옷입기에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과거에는 복식에 대한 엄격한 제도를 두고 신분이나 관등에 따라 서로 다른 색과 문양을 옷에 사용했다. 더구나 예를 숭상하는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옷입기는 더욱 각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옷입기의 엄숙함은 현대사회에서도 종종 발견하게 되는데, ‘금배지(badge)와 검은 색 양복’으로 상징되고 있는 국회의사당이 그렇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국회의원으로서 국회에 첫 등원하던 날 캐주얼차림으로 등장하면서 보수적인 권위에 대한 도전의식을 드러내는 해프닝을 만들기도 했었다. 물론, 당시 유 장관은 국회의원들의 항의와 반발로 그날 있을 선서식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옷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옷으로 가리고자 했던 ‘몸’도 있다. 몸을 드러내는 것을 넘어 아예 몸을 새롭게 구성하기까지도 한다. 옷이 몸을 드러내는 방식은 역설적인 표현에 가깝다. 즉, 옷이 몸을 가리기 때문에 몸을 드러내는 것도 가능하다는 얘기다. 가리지 않는다면 노출이 있을 수 있겠는가.

옷은 저마다 섹슈얼 포인트를 드러내기 위한 디자인으로 제작된다. 예를 들어, 브래지어(brassiere)는 가슴을 가림으로써 가슴의 존재를 드러내고, 팬티는 성기를 가리면서 성기의 존재를 알리게 된다. 단지 가리기 위한 것이라면, 그렇게 화려한 장식을 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단지 드러내는 게 아니라 이상적인 형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능성을 갖추는 것도 이제는 의류디자인의 기본적인 설정이 되고 있다.

흔히 옷에 대해‘제 2의 피부’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어쩌면 옷은 제 2의 몸, 제 2의 자아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옷의 이러한 각별함은 사십구재 마지막 날 망자의 옷을 태우는 불교의 제식에서 생각할 수 있다. 옷은 그만큼 한 사람의 자아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그것을 태우는 일이 그를 떠나보내는 마지막 의식이 되는 것은 아닐까.

에리히 프롬((Fromm, Erich, 1900.3.23~80.3.18)은 인간은 살아 있는 동안 페르소나를 만들 수 없다고 했다. 인간은 매우 복합적인 성격을 동시에 소유하고 유동적인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남긴 어떤 흔적과 기억은 한 사람에 대한 고유한 추억이 될 수 있다. 옷은 바로 한 사람의 흔적이요, 그를 기억하게 하는 매개이고, 비로소 그 사람에게 개성을 부여하고 한명의 인물로서 그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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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대성과 자아정체성
 Anthony Giddens 저, 권기돈 역, 새물결, 1997
2) 그는 인체를 황금비(1:1.618)로 분석해서 고전적인 비례개념을 적용시켰으며 이후 공업생산에까지도 적용하게 되었다. 이상적인 인체비례가 되기 위한 비례는 배꼽의 위치가 몸 전체를 황금분할하고, 어깨의 위치가 배꼽위의 상반신을, 무릎의 위치가 그 하반신을, 코의 위치가 어깨위의 부분에서 황금비율에 위치하는 경우라고 한다.

그림설명-----
그림1) 데이비드 호크니(Hockney,David)의 「니콜스 계곡(Nichols Canyon) 1980. 산과 풀, 나무들을 보면 측면에서 본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밭이나 전체적인 구도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을 느끼게 한다. 사실, 이 그림에는 고정된 시점이 없다. 객관적으로 묘사보다는 작가의 주관적 경험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실측지도와 메모지에 그리는 약도의 차이를 생각해보자. 실측과 달리 경험에 따라 어떤 길은 더 길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림2) 브론치노라는 사람이 그린 이 그림에는 다양한 알레고리가 등장한다. 미와 사랑, 어리석음과 변덕, 불성실과 질투 등이 그것이다. 추상적인 관념조차도 생생한 캐릭터로 표현하고 있다.
그림2) 인체를 황금비로 분석한 모듈러(moudler). 이 그림은 흔히 ‘손을 올린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림3) 일본의 만화가 마츠모토 레이지의 대표작인 'Galaxy Express 999'. 한국에서는 ‘은하철도999’라는 제목으로 방영됐었다.
그림4) 어느 쇼핑몰 광고의 한 장면

2010년 8월 25일 수요일

사회성(Sociality)과 이동성(Mobility), 그리고 직접성(直接性, immediacy)

이 글은 2009년 12월 28일 『시멘틱웹 시대의 정보플랫폼 UX 디자인』 세미나 ‘Web Trend & UX’ 주제에 대한 발표 내용을 다시 정리한 것입니다. 이글을 정리하면서 느낀 점은 변화가 매우 급진적이라는 것입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이글의 모티브가 되는 몇몇 개념들은 희미한 것이었지만, 8개월여가 지난 지금 모든 것은 새롭고 여전히 역동적입니다. 어쩌면, 이글이 담고 있는 내용은 찰나적인 풍경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날려버리는 변화의 거센 회오리 속에서 우리를 지탱할 통찰을 발견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여러분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시작하며

 필자는 IT 산업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업무를 수행한 경험이 없는 사람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돌아보면 IT 분야의 지속적인 영향 속에서 살아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필자가 고등학생이었던 80년대 중후반부터 대부분의 고등학교에 컴퓨터 학습 시설이 들어서면서 공공교육 분야에서 본격적으로 컴퓨터교육이 시작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이 무렵 삼성 SPC1500이라는 모델을 구입하면서 PC를 처음 접하기도 했다. 당시를 생각하면 지금 필자의 일상을 가득 메우고 있는 컴퓨팅 기술들은 정말 놀라운 것이 아닐 수 없다.

 IT 산업, 그 가운데 인터넷과 웹 분야를 좀 더 깊게 들여다보며 이해를 넓힐 수 있었던 계기는 『월간 w.e.b.』의 편집장을 맡게 되면서다. 사실, 그 기간도 기껏해야 2년여 정도의 짧은 세월에 지나지 않아 현업에 있는 전문가들이 갖고 있는 식견에 비할 바가 못 된다. 하지만 편집장이라는 직무는 해당 분야에 대한 통찰을 이끌어내야 하는 책임을 가질 수밖에 없는 직책이다. 그것은 필자 개인의 사정을 헤아려 덮어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글을 통해 소개하고자 하는 몇몇 개념은 취재와 글쓰기를 통해 갖게 된 웹에 대한 필자의 의견이지만,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등을 떠밀려 만들어낸 것이기에 치밀함이나 완성도에 있어서 부족한 면이 많을 것으로 생각한다.


 2009년 12월 28일 코엑스에서 있었던 『시멘틱웹 시대의 정보플랫폼 UX 디자인』 세미나에서 소개한  열쇳말들은 편집부에 2010년의 방향을 제시하는 의제였다. 그렇기 때문에 2010년 올 한 해 동안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글쓰기를 해야 했던 과제이기도 했다. 비록, 지금은 『월간 w.e.b.』 편집장이라는 직무를 떠난 상태이지만 여전히 필자에게는 중요한 관심사이며 또한, 소셜서비스연구모임에서 필자가 발표하게 될 ‘인터넷을 통해 발현되고 있는 인간의 사회성’에 대한 주제를 풀어 나가기 위한 시발점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필자에게 글쓰기의 동기를 부여해준 소셜서비스연구모임에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다. 이제 다시 생각을 정리하고 이를 공유할 필요를 느낀다. 이런 기회를 통해 앞으로 준비할 발표자료가 여러 사람의 생각으로 보태지고 다듬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

2009년을 정리하며

 2009년을 마무리하면서 필자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요약하자면 두 가지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사회성(Sociality, 社會性)과 이동성(Mobility, 移動性)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특히 사회성은)는 2009년뿐만 아니라, 인터넷과 웹이라는 미디어의 탄생과 더불어 면면히 이어지면서 발현되고 있는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많은 것을 바꾸어놓을 만큼 강력한 변인으로 작용해왔다. 먼저 사회성에 대한 설명을 시작으로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1) 사회성
 대개, 대인관계가 원만한 성품을 일컬어 사회성이 좋다고 표현한다. 사회성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사회생활을 하려고 하는 성질, 혹은 그런 성격 등을 의미한다. 영어사전에서는 ‘Sociality’를 집단이나 군거를 이루고자 하는 속성을 일컫는 말로 설명하기도 한다. 2009년을 마무리하면서 그 해의 중요한 특징으로 사회성을 제시하기는 했지만, 사회성이 2009년 웹분야의 특징만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웹의 역사를 푸는 열두 가지 키워드』라는 기획취재를 진행하면서 느낀 것은 웹은 태생적으로 개방과 참여, 공유를 지향해 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회성은 웹이 생득적으로 갖고 있는 철학인 셈이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초의 웹과 구분하기 위한 것으로 웹2.0이라는 개념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웹의 생득적인 사회성과 웹2.0의 그것과는 어떤 차별성이 있는 것일까? 필자의 견해를 보태자면, 웹2.0은 웹이 우리의 생활을 형성하고 있는 경제와 정치 등을 포함해 전 사회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자면, 미디어 환경의 급격한 변화가 있다. 이런 점은 기술적인 개념의 웹과는 구분되는 양상이고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특히, 공급자와 사용자의 관계가 복잡한 관계의 문맥 속에서 융해되고 그 경계가 사라진 것은 웹2.0의 가장 큰 특징이다. 그리고 UCC는 이러한 특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개념이다.

 그런데 웹2.0이라는 개념을 두고 2009년의 특징으로 ‘사회성’이라는 개념을 다시 강조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개방적인 소셜미디어가 국내에서도 폭발적으로 이슈를 생산하기 시작했었고, 소셜컴퓨팅(또는 클라우드 컴퓨팅)이 구체적인 양상을 띠면서 현실에 영향을 미치던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2008년 말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의 당선과 더불어, 2009년은 ‘허드슨강의 기적’이나 중국 소수민족의 독립투쟁, 이란의 민주화 사태 등 세계적으로 굵직한 이슈와 맞물려 SNS에 대한 인식이 급속히 확대되고 있었다. 또한, 소셜컴퓨팅은 SaaS(Software as a Service)나 오픈 플랫폼, 인터넷 테더링 등과 같은 양상으로 우리의 현실 속으로 성큼 다가오고 있었고, 지금은 비물질화된 네트워크경제2)의 핵심 플랫폼으로서 입지를 굳혀가고 있다.

사회성이라는 특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부연했던 열쇳말과 이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ㄱ. Social Network Service
 소셜미디어나 사회관계망 서비스가 2009년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트위터로 대표되는 소셜미디어의 양상은 이전에 국내에서 서비스되던 방식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었고, 세계적인 추세를 형성해 왔다.3) 최근 보도에 따르면 트위터 검색 건수가 약 8억 건으로 야후를 넘어섰다고도 한다. 또한, ‘Promoted Tweets’ 이후 ‘@earlybird’라는 광고상품을 내놓으면서 야후와 구글이 쌓아온 검색엔진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나가고 있다.4)


 SNS의 또 다른 위력은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에서 발견할 수 있다. ‘The Medium is the Massage’라는 명제는 미디어 분석가 마샬 맥루언(Marchall McLuhan)과 그래픽 디자이너 쿠엔틴 피오레(Quentin Fiore)가 함께 저술한 책의 제목이다. 이것은 미디어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이 인간이 생각하는 방식이나 세계상에 대해 결정적인 영향력을 가질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미학자 진중권 씨도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미디어가 현실”이라는 말을 했었다. 그는 “아주 사소한 것도 미디어에 노출되었을 때 현실로 받아들여지지만, 아무리 중대한 사실도 미디어의 주목을 끌지 못한다면 현실이 될 수 없다”라고 부연했다.

 이것은 미디어가 가진 영향력의 그늘이라고 할 수 있다. 미디어 기술의 발달이 세상으로 향하는 창을 더욱 넓혀주었지만, 세상을 비추는 창(일종의 프레임)은 일반 수용자들이 범접하기 어려운 영역이었다. 그리고 특정한 방향의 창을 선택하는 문제는 바로 어떠한 세계상을 가질 것인가의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다.

 하지만, 견고한 프레임을 가진 창과 창들 사이로 무수한 틈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소위 일인 미디어라고 일컫는 새로운 매체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의 프레임은 견고한 것이라 할 수 없지만, 기존의 매체가 지닌 권위를 흔들어 놓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존재를 부정할 수 없는 거대한 실체로서 다가오고 있다. 이들의 등장이 기존 미디어의 영향력이나 권위를 무용지물로 만들 것이라 생각하지 않지만, 미디어 환경을 구성하는 한 축으로 작용하면서 올드미디어에 대한 위협적인 견제력과 유연한 미디어 프레임을 통해 생명력을 꾸준히 확보해 나갈 것이라 생각한다.


 디지털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일인미디어 또는 독립미디어의 출현은 웹으로 인해 변화하고 있는 사회상의 단면을 드러내고 있다. 수용자로 머물러 있던 소비대중은 생산자 혹은 제공자와의 관계에서 대등한 위상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러한 경험은 수동적인 소비대중으로서의 자의식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제 소비대중의 시대는 가고 문화적 주체로서의 시민사회가 새로운 전성기를 맞고 있다고 생각한다. 소위 문화민주주의가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ㄴ. Social Computing
 소셜 컴퓨팅 역시 IT산업에서는 오래된 화두이다. 하지만, 2009년을 즈음해서 더욱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새로운 컴퓨팅 방식은 우리의 일상을 하나씩 점령해 나가고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취재원은 큐박스(Qbox)라는 음원 서비스 업체다. 큐박스는 주로 마이스페이스의 배경음악을 자원으로 활용한 서비스다. 특히, 이모셔널링크(Emotional Link)라고 하는 집단필터링(Collaborative Filtering) 기술은 사회적 검색(Social Search)의 다양한 방법론 가운데 선구적인 모델로 회자되기도 한다. 5)



 큐박스가 정말 놀라웠던 점은 경영방식에 있다. 설립자 피터 백(Peter Baek)은 자신들의 경영방식을 네트워크 컴퍼니(Network Company)라고 설명했다. 큐박스의 본사 사무실은 미국에 위치하고 있지만 설립자 피터 백을 비롯해 직원 및 외주 전문가들은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다. 큐박스가 다국적 직원들과 협업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도구는 구글앱스(google-apps)와 스카이프(Skype)다. 물리적인 공간이 없이 네트워크만으로 회사가 운영된다는 점은 매우 놀라운 것이었다. 피터 백은 “지식근로자는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통제하는 존재”라는 피터 드러커(Peter Ferdinand Drucker)의 말을 들어 큐박스가 일하는 방식을 인상적으로 설명했었다. 또한, 그는 ”여느 회사처럼 출퇴근이 없지만 자신들만큼 열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일하는 조직도 흔치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또 다른 사례로 데이투데이잉글리시(day to day English)라는 서비스도 있다. 이 경우, 대학에 재학 중인 선후배가 필리핀 원어민 영어강사와 국내 학생들을 연결해주는 서비스를 창업한 사례다. 운영자들은 회원관리를 위해 네이버 카페를 활용하고, 스카이프와 구글앱스 등을 서비스 운영에 활용하고 있다. 이들은 서울과 지방에 흩어져 각자의 연고지에서 생활하면서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지만 운영상의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고 했다. 말하자면 이들도 큐박스와 같은 네트워크 컴퍼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사례의 핵심적인 공통점은 서비스 제공과 협업을 위한 컴퓨팅으로 인터넷과 웹 기술만을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소셜 컴퓨팅(또는 클라우드 컴퓨팅)이 가져올 변화의 단면을 보여준다. 서비스를 구축하기 위한 진입장벽이 현저히 낮아짐으로써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아이디어로 사업을 펼칠 수 있는 기회가 더욱 넓어지고 있는 것이다.

 서비스의 진입장벽은 주로 이를 운영하기 위한 물리적인 조건 즉, 시간이나 공간과 밀접하다. 시간은 주로 서비스를 개발하기 위한 과정이나 협업 과정에 소요되는 가치이다. 또한, 사용자와 공급자가 서비스와 이에 상응하는 가치를 주고받는 것, 그리고 원활한 협업과 조직을 운영하기 위한 공간 등에 물리적인 제약이 따른다. 하지만, 이런 전통적인 진입장벽은 소셜컴퓨팅으로 쉽게 넘어서게 됐고, 네트워크를 통해 제공받을 수 있는 저렴한 기술은 쉽게 서비스를 구축할 수 있는 환경이 되고 있다.


 클라우드컴퓨팅은 인프라적인 측면에서도 ’친환경 기술'이라는 맥락과 맞물리면서 매우 중요한 기술로 자리하고 있다. 이미지나 애니메이션, 게임, 동영상 등의 콘텐츠가 웹을 기반으로 서비스되면서 트래픽이나 데이터 저장 및 관리가 중요해졌다. 이를 위해 남아도는 컴퓨팅자원을 끌어 모아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것 역시 클라우드 컴퓨팅의 중요한 장점이다.

 물론, 소셜컴퓨팅이나 클라우드컴퓨팅에 대한 견해는 논자에 따라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고, 명확하게 정의된 개념이라 할 수 없다. 하지만 서비스를 구축하기 위해 특정한 시스템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제공되고 있는 서비스를 활용한다는 점. 또는, 이를 위해 막대한 자본을 들여 인프라를 구축하기보다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자원을 모아서 활용한다는 점 등은 사회성이라는 공통된 특징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ㄷ. Open Social & Open Platform
 구글의 정의에 따르면 ‘오픈소셜’은 웹 애플리케이션 개발에 필요한 공동 API(Common Application Program Interface)를 말한다. 이는 이미 제작된 웹 애플리케어션을 새로운 서비스 제작에 활용하는 매시업(Mash up)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픈소셜은 처음 구글이 자신들의 광고 시스템인 애드센스(AdSense)를 확산시키고, 성장가도를 달리고 있는 페이스북을 견제하기 위해 세운 전략(2007년)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졸속으로 준비된 프로젝트였다거나 선의를 가장한 경쟁전략이었다는 등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오픈소셜의 의미가 축소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현재 오픈 API를 활용한 매시업 개발방식은 많은 관심을 받고 있고, 성공적인 사례들도 소개되고 있다. 또한, 위젯이나 모바일 서비스 개발에서도 중요한 방법론으로 자리 잡고 있다.

 페이스북 커넥트(Facebook Connect)와 트윗터의 개방정책은 매우 모범적인 사례로 자주 거론된다. 이 둘은 각각 하나의 서비스로서 출발했지만, 제삼자(Third party)들의 참여를 통해 이들 서비스와 매시업된 무수히 많은 서비스들이 탄생할 수 있었다. 두 서비스는 이미 거대한 생태계를 거느린 개방형 플랫폼으로 성장했다. 특히, 이들과 같은 사회관계망 서비스에서 개방정책은 거스를 수 없는 큰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오픈 API에서 시작된 개방정책은 개방형 플랫폼에 이르고 있다. 무엇보다도, 풍부한 참여자(Third party)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것과 이들의 충성심을 강화하는 것이 서비스의 성패를 가르는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 얼마나 개방적인 정책을 펼치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는 상대적이지만, 이 경우 애플의 앱스토어는 의미 있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아이폰의 성공 배경에 대해서 디자인이나 혁신적인 사용자 경험 등이 거론되고 있지만, 앱스토어의 성장을 가장 중요한 성공요인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2009년 4월에 해비매크(Heavy Mach)라는 게임을 개발한 변해준 씨처럼 아이폰이 한국에 출시되기 전에 앱스토어를 통해 큰 수익을 벌어들인 국내 개발자가 등장했다는 점은 꽤 흥미로운 현상이었다. 산업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한 개인 개발자와 이들의 활약은 앱스토어와 같은 오픈 플랫폼이 만들어내는 전혀 새로운 변화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이폰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대기업을 중심으로 수직적인 산업생태계의 실체가 어떤 것인지를 볼 수 있었다.


앱스토어와 같은 오픈 마켓, 구글의 크로미엄 프로젝트나 페어스북의 커넥트 등과 같은 오픈플랫폼과 같은개방정책을 통해 서비스가 서로 매시업되는 것, 그리고 서비스를 둘러싼 생태환경 즉, 참여자와 제삼자 등이 성공의 조건으로 자리 잡고 있는 상황을 설명하는 열쇳말 역시 ‘사회성’으로 볼 수 있다.

ㄴ. Three Screen

 사회성을 설명하기 위해 제시한 마지막 열쇳말은 쓰리스크린이다. 이것은 모바일과 TV, PC를 통해 동일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식을 말하며 클라우드 컴퓨팅과 밀접하다. 쓰리스크린은 그동안 별개로 간주되었던 단말기의 역할과 기능이 하나의 서비스로 융합된다는 점에서 사회성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사회성은 개방과 융합, 네트워크, 집단성, 생태계 등과 같은 일련의 현상들을 아우르기 위해 선택한 개념이었다. 그리고 IT 산업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현상들은 우리의 삶을 미디어 혹은 가상세계와 단절 없이 지속적으로 연결시키는 공통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또한, 이것은 유비쿼터스라는 개념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2) 이동성
 그리고 이동성. 이 점은 부연이 필요 없을 정도로 명백한 변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데스크톱피시가 등장하자 많은 사람들은 사이버공간이 인간 활동에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서게 한다고 열광했었다. 데스크톱피시가 라이프스타일과 경제활동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인해 우리가 물리적인 제약을 완전히 넘어섰다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이런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 컴퓨팅환경에 이동성이 부여되기 시작했고, 비교적 고가지만 랩톱피시(노트북)가 등장한다. 하지만, 랩톱피시 역시 한계를 갖고 있었다. 그 한계는 신분이나 계층적인 측면에서 두드러진다. 말하자면 랩톱피시가 일상을 파고들기에는 고가였고, 그 이동성은 데스크톱피시의 사용성을 넘어설 만큼 편리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필자도 오래 전부터 업무용으로 랩톱피시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프리젠테이션과 같은 특별한 목적 외에 노트북을 들고 다니면서 컴퓨팅을 한 경험은 그다지 많지 않다. 거칠게 정리하자면, 데스크톱피시와 외장하드디스크의 장단점을 갖고 있는 수준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한 가운데 스마트폰, 특히 아이폰이 등장하면서 세계적으로 큰 파급효과를 일으키고 있다. 이는 완벽한 이동성을 갖춘 컴퓨팅을 통해 현실과 가상공간의 경계가 사라진 혼합현실이 비로소 구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설명한 사회성이 갖고 있는 특징과 마찬가지로 이동성 역시 우리의 삶을 단절 없이 지속적으로 미디어와 연결시켜주는 사용자경험을 제공하고 있다.

사회성과 이동성에 따른 변화
● 실시간 컴퓨팅
● 온라인 인맥의 영향력 확대
● 익명사회에서 온라인 대면사회로
● 인터넷 서비스의 진입장볍 축소
● 단절 없는 정보활동과 사용자경험
● 콘텐츠의 폭발적인 증가 


3) 2010년을 향해 던진 화두, 직접성

 2009년을 기점으로 사회성과 이동성을 갖춘 새로운 컴퓨팅 방식은 더욱 가속을 더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회성과 이동성 이후 무엇을 주목할 것인가가 관건이다. 그래서 필자는 2010년의 화두로 ‘직접성(直接性, immediacy)’을 제시했다. 미디어의 영향력이 매우 직접적인 것이라는 점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미디어의직접성은 미디어 스스로 존재를 감추려는 속성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수용자(또는 사용자)는 미디어의 존재를 망각하게 되고, 결국 콘텐츠가 매개되고 있다는 것 인식을 약화시키게 된다. 예를 들어, 3차원 입체영상은 수용자가 콘텐츠 속에 들어와 있다는 착각을 주는 것이고, 터치 인터페이스는 인터랙션의 프로세스를 잊고 매우 직접적으로 콘텐츠를 제어한다는 느낌을 준다. 직접성을 이루는 속성은 아래 다섯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ㄱ. 더욱 실감나게
 먼저, 미디어기술(뉴미디어를 포함)은 더욱 실제적인 경험을 재현하기 위한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는 점을 들 수 있다. TV의 발전과정을 살펴보면 흑백에서 칼라로, 칼라에서 평면 브라운관으로, 저해상도에서 고해상도로, 그리고 이제는 삼차원 입체영상을 재현하는 TV들이 앞 다퉈 등장하고 있는 추세다. 인터넷으로 유통되고 있는 콘텐츠도 대용량을 처리하는 네트워크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품질이 고도화되고 있다.

ㄴ. 실시간
 다음으로 미디어는 실시간에 더 가까워지려고 한다. 뉴미디어는 말할 것도 없다. 이미 우리는 실시간으로 가상세계와 접속하고 있는 혼합현실의 시대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이것은 올드미디어가 뉴미디어 기술을 적극 활용하면서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특히, 뉴미디어가 이룩하고 있는 실시간 커뮤니케이션은 미디어 환경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단적으로 올드미디어가 전유하고 있던 뉴스로서의 가치나 속보성의 가치 등이 무너지고 있다는 점을 예로 들 수 있다. 이제 실시간으로 상호작용하는 TV는 이미 우리의 현실로 성큼 다가와 있고, 상호작용의 강도는 더욱 강해지고 있다.

ㄷ. 나를 이해하고 가장 자연스러운
 그리고 미디어는 ’나를 이해하는 것’으로 발전하고 있다. 수많은 단계를 거쳐 필요한 정보를 찾아가는 과정은 혁신적으로 단축되고 있다. 이것은 미디어가 나를, 그리고 나의 행동패턴을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내가 사용하는 단말기는 내가 미디어를 접속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지만, 미디어가 나의 삶을 들여다보고 정보를 수집하는 창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모바일은 매우 사적인 공간에까지 이들의 눈길을 불러들이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를 이해하는 미디어는 매우 직관적인 소통방식을 제공할 수 있다. 지금까지 인터페이스는 학습과 숙련의 과정이 필요한 것이었다면, 앞으로 인터페이스는 신체가 지닌 생물학적인 코드를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접속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실시간으로 우리의 은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한 필수적인 고려사항이면서도 유익한 사용성을 제공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미덕으로 강조되고 있다.

 자연스러운 방식의 인터페이스는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한 상태다. 대표적으로 제스처 센싱(Gesture Sensing) 기술이 있다. 이것은 단순히 의식적으로 움직이는 손동작만을 인식하는 수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부지불식간에 표정을 통해 드러나는 우리의 희노애락을 기계가 이해하고 이를 정보활동에 활용할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자연스러운 방식의 인터페이스를 구현하기 위한 인체-센서로 뇌는 더할 나위 없는 궁극의 인터페이스가 될 수 있다.


 자연스러운 방식의 인터페이스는 매우 직접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의도적으로 우리의 감정이나 생리적인 반응을 감추는 것도 불가능해질지도 모른다. 이것은 직접성이 가진 파괴력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직접적인 사용자경험을 위한 기술
실감나는 것: 증강현실, 3차원 입체영상, 홀로그램, MS포토신스, 360 파노라마 카메라 
나를 이해하는 것: 상황인식기술, 시맨틱 웹, 개인화 검색, 위치기반 
직관적인 것: 음성검색, 제스처 센싱, 중력센서, 방향센서 
실시간에 가까운 것: 트위터, 실시간 검색, 기타 모바일 인터넷 기반의 서비스
만질 수 있고 자연스러운 것: 터치스크린, 필체인식, 얼굴인식 등

그림. 맨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MS에서 개발한 탁자형 컴퓨터 서피스, 구글의 음성검색, 360도 파노라마 카메라, 시맨틱 검색기술을 적용한 큐로보 검색엔진, 웹사이트 내비게이션을 위해 제스처 UI를 적용한 도시바 브랜드 사이트.

직접성과 더불어 주목할 주제 ‘인간’

 기술은 인간과 자연을 모방하면서 발전해 왔다. 과거 90년대 이후 화성에 파견된 많은 화성탐사선이 인간의 오감을 갖고 있다는 점은 이러한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인간과 기계의 결합’을 주제로 글을 쓰면서 가장 많이 예로 든 것이 화성탐사선 ‘패스파인더’이다.

 당시 패스파인더가 화성의 착륙지점으로부터 보내오는 자료는 매우 구체적인 것이었다. 그 자료에 의하면 그곳의 기온은 섭씨 영하 22도 내외이고, 시속 1.6㎞정도의 약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리고 착륙지점 부근에 있는 바위들은 지구의 화산암과 같은 성분이라는 분석결과도 보내왔다. 패스파인더에 탑재된 로봇 소저너는 착륙지점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서 화성의 모습을 관찰한 것과 그곳의 바람과 흙의 감촉을 전해왔다. 이러한 데이터는 지구에서 구체적인 가상현실로 재현되었고, 인간은 이를 통해 화성을 경험했다.

 2010년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영화 아바타의 주요 모티브가 패스파인더가 발사되던 90년대 중후반부터 구상되었다는 것은 단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탐사선과 아바타는 역할과 기능 면에서 서로 유사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이렇듯, 다양한 도구와 기술은 인간 신체의 연장으로 보는 것에 무리가 없어 보인다. 망치와 펀치는 인간의 손을, 카메라와 모니터는 인간의 눈을, 자전거 혹은 자동차와 같은 탈 것은 우리의 발을 연장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지구의 동물 가운데 인간은 매우 나약한 개체이지만, 인간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은 제한된 신체의 기능을 확장하는 기술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이다.


그림. 화성탐사선 패스파인더에 탑재된 로봇 소저너는 인간의 눈처럼 두 개의 카메라로 짧은 시간에 수많은 화성의 이미지를 촬영하여 보내왔다. 촬영된 이미지들은 스테레오영상이나 컴퓨터 속의 가상현실로 재구성되었다. 놀라운 것은 소저너의 눈뿐만이 아니다. 소저너가 이동하는 순간 바퀴에 장착된 센서가 흙의 질감을 분석하기도 하는 등, 인간은 화성에 가지 않고도 화성을 느낄 수 있다. 자료출처_http://mpfwww.jpl.nasa.gov

 그런데 한편으로, 기술과 산업이 고도로 발전함에 따라 우리가 쉽게 잊어버리는 것이 있다. 그것은 기술의 목적이 ‘사람’이라는 존재론적인 명제다. 그래서 네트워크를 통해 기술의 혁신과 산업의 성장 속도가 빨라지고 있는 지금 가장 주목해야 할 대상은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국경을 넘어선 치열한 경쟁 속에서 기술 자체가 기술의 목적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기술의 진보가 이미 우리의 생활이나 필요를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가 즐기고 있는 기술은 우리에게 필수불가결한 것인가?

 또한, 우리가 열광하고 있는 기술이 과연 우리 자신인 인간에게 유의미한 것인지를 따져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인간에 대한 연구는 지속되어야 하고, 이러한 성찰 위에서 IT 기술이 발전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컴퓨터는 맥락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 처음 컴퓨터가 등장하게 된 것은 정확한 계산을 위한 연산장치로서 개발된 것이다. 이후, 전자기술이 급속도록 발달하면서 컴퓨터는 기계의 작동을 제어할 수 있는 프로세서로 활용되고 있다. 또한, 다양한 정보를 저장하거나 신속하고 정확하게 관리하기 위한 데이터관리 도구로 활용되기도 한다. 우리의 생활에 컴퓨터가 깊이 활용되면서 인간의 생활을 관찰하고 정보로 기록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되기도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컴퓨터는 여느 기계와 마찬가지로 자연상태에 존재하는 불확정성을 없애기 위한 도구이다.

 컴퓨터가 갖고 있는 우수한 기능은 비단 자연의 불확정성을 없애기 위한 것뿐만 아니라 인간사회가 갖고 있는 불확정성을 통제하기 위해서도 활동되고 있다. 이러한 컴퓨터 활용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이지만, 불확정성을 없앰으로써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경제적인 논리는 있을 수도 있는 심각한 문제를 외면하는 구실이 되고 있다.


 한편, 컴퓨터는 불확정성을 없애고 효율성을 높여주기도 하지만, 이와는 달리 불확정성을 소통하는 도구로도 활용되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이것은 인간의 창의적인 활동에 시너지로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에서 컴퓨터는 매우 뛰어난 저작 도구라 할 수 있다. 정보를 검색하고 수집하기 용이하고, 이를 쉽게 가공함으로써 창조적 힘을 발휘하도록 돕고 있다. 이외에도 시간과 공간의 장벽에 가려 있던 인간과 인간의 네트워크를 활성화시켜줌으로써 자연상태에서 수백 년 혹은 수십 년이 걸리는 인간 네트워크의 상호작용을 폭발적으로 증가시켜주고 있다. 그럼으로써 인류문명은 문자와 인쇄기술 이후로 발전의 속도에 가속력을 증가시키고 있다.

 이렇게 컴퓨터와 IT기술은 파괴적인 힘과 창조적인 힘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그리고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는 우리의 몫이다. 지금 우리가 옳은 선택을 하기 위해서 우리 자신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이런 관점에서 카네기멜론대학의 ETC(Entertatinment Technology Center) 책임프로듀서(학장)인 도날드 마리넬리(Ph.D Donald Marinelli) 박사가 갖고 있는 ET에 대한 철학은 의미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는  “궁극적인 융합(Ultimate Convergence)과 상호연결성(Interconnectivity)”을 ET가 추구하는 최종적인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궁극적인 융합은 일과 휴식, 놀이, 스포츠, 창조력과 영성, 교육, 즐거움 등이 융합된 것이며, 이를 통해 지구와 인류에 공헌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그는 궁극적인 융합은 더 나아가 인간의 오만과 무지로 인해 가로막혀 있는 장벽을 없애고 인간이 갖고 있던 상호연결성을 복원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6)

 과연 이것은 어떤 모습으로 구현될 것인가? 필자는 영화 아바타에 등장하는 판도라 행성과 나비족의 모습을 통해 궁극적으로 융합된 세계를 상상해 본다. 영화에서 나비족과 인간의 모습은 극명하게 대립되어 나타나고 있다. 오만과 무지로 인해 소통할 수 없는 인간은 판도라 행성을 탐욕의 대상으로만 생각한다. 그리고 그 탐욕을 채우기 위해 판도라 행성과 나비족은 통제와 제어의 대상일 뿐이다. 이제 우리는 탐욕스럽고 무지한인간으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판도라 행성의 생태계를 지키기 위한 편에 설 것인지를 고민하고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할 시점에 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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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0년 4월은 창간 12주년을 기념하는 달이었다. 이를 위해 『웹의 역사를 푸는 열두 가지 키워드』라는 주제를 40여 페이지에 걸쳐 ‘special issue’로 다루었다.
2) 사회비평가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 1943~)은 그의 저서 『소유의 종말(원제: The Age of Access, 2001)』에서 미래사회는 항구적인 권리를 얻기위한 ‘소유’가 ‘접속’이라는 방식으로 대체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이는 현재 디지털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네트워크경제로 구현되고 있고, 소셜컴퓨팅이 그 중심에 있다고 생각한다.
3) 트위터의 특징에 대해서는 2010년 3월 현대카드 사보에 기고하기 위해 작성했던 초고 『트위터에 대한 단상』을 참고하길 바란다. Kangcd.textcube.com > User eXperience
4) 「트위터 검색 건수 '8억'…야후 넘어섰다」 전자신문 2010.7.8 황지혜기자
5) ‘special issue’에 ‘혁신의 또 다른 이름, Globalization-거리가 소멸한 무한공간에서 펼치는 Qbox.com’이라는 제목으로 2008년 『월간 w.e.b.』 10월호에 게재되었다.
6) 「궁극적인 융합을 통해 꿈꾸는 아름다운 삶」『월간 w.e.b.』3월호 'Trend Maker'섹션

2010년 3월 29일 월요일

감각과 기억, 그리고 현실

아무 것도 볼 수 없다면
나는 커피믹스나 자판기 커피를 마시는 것으로도 만족스럽지만, 점심 식사 후 업무 외적인 소통을 위해 커피숍에서 에디터들과 종종 커피를 마시곤 했다. 이번 커피브레이크에서 화제가 된 것은 NHN에서 주관하고 있는 '어둠속의 대화'라는 행사다. 이 행사의 특징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시각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상황을 경험하는 것이다. (전시정보: www.dialogueinthedark.co.kr)

사실,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경험은 흔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명 속에 살고 있는 이상, 희미한 불빛은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눈을 감더라도 빛은 기어이 눈꺼풀을 뚫고 희미한 영상을 남긴다. 에디터들에게도 볼 수 없는 상황은 특별한 경험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자신의 자신의 경험을 설명하며 열띤 수다를 펼쳤다. 나는 그들의 옆에서 듣기만 했지만 얘기는 매우 흥미로웠다.

행사장에서는 참가자들이 음료수를 마시고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맞히는 게임을 하기도 했었다. 시각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미각과 후각에만 의존해 음료의 종류를 맞히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떤 참가자는 '아침햇살'이라는 쌀로 만든 음료와 캔커피의 맛을 혼동했다. 또, 배를 타는 체험도 있었다고 한다. 바람과 소리, 좌석이 출렁거리는 느낌만으로 참가자들은 시원한 뱃놀이를 실제처럼 경험했다고.

특히 흥미 있었던 내용은 시각이 완전히 차단되자 참가자들이 말이 많아졌다는 점이다. 아마도 끊임 없이 말을 주고 받으면서 시각이 차단되었을 때의 고립감이나 불안감을 떨쳐버리려고 했을 것이다. 이 얘기는 자연적으로 들어오는 모든 감각정보를 인위적으로 차단하는 실험을 떠올리게 했다.

이 실험에서 피실험자는 며칠 동안 모든 감각이 차단된 채 지내야 했다. 그러자 백일몽이나 연상작용, 환각이나 망상을 스스로 생성하는 모습이 관찰됐다. 이때 나타난 심리적인 현상은 "현실과의 대응이 결여된 자폐 심리"라고 한다. "기억 속에서 격리된 지식이 두서없이 형성되어 그것이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되는 "현실성 식별 혼란"이라는 것이다. 마치 외부로부터의 정보부족을 스스로 보충하려 애쓰는 것처럼 말이다. 실험은 결론적으로, 인간은 '외부의 정보에 의해 유지되는 존재'라는 점을 설명한다.1)

에디터들은 앞으로 도서관을 경험할 수 있는 전시실을 개관할 것이라는 말도 했다. 온갖 시각정보로 가득한 도서관을 시각이 차단된 상황에서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 에디터들은 나름의 상상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책장에서 풍기는 고서의 냄새가 도서관 경험의 단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책장을 넘기는 소리나 조심스럽게 의자를 끄는 소리도 도서관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감각적인 경험이다. 시각정보가 차단된다면 촉각이나 청각, 후각 등과 같은 다른 감각기관이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평소에 의식하지 않았던 작은 것들이 내가 처한 상황을 인식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이들의 수다를 들으면서 문득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이 시각정보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단지, 시각경험을 차단하는 것만으로도 전혀 새로운 경험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브랜딩과 감각
어느 순간, 에디터들은 자신들만 얘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했는지 나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들의 수다에 합류하기 위해 나는 몇달 전 커피를 마시면서 나누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그때 우리는 브랜드의 허와 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마도 커피에 대한 취향을 이야기 하면서 화제가 그쪽으로 흘렀던 것 같다. 나는 특정 브랜드에 대한 취향에는 실제적인 경험보다는 마케팅이나 브랜딩에 의해서 형성된 이미지가 많다고 얘기했었다. 에디터들 역시 그점을 인정하면서도 브랜드에 따라 미묘한 차이가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미묘한 차이를 감지하는 것은 상대적일 수 있다. 나처럼 비염이 있어 항상 답답한 코를 달고 사는 사람이라면 커피는 고사하고 라면 맛도 그게 그것으로 느껴질 것이다. 한편, 감각적으로 섬세한 취향은 고급스러운 문화적 수준을 대변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포도주를 마시기를 취미로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포도주를 마시는 방법이나 예절 등을 몸에 익히고 내세움으로써 자신들을 여타의 취향과는 문화적 구분을 두려는 경향이 있다.

특히, 포도주의 맛을 구분하는 섬세한 표현에서 그런 태도는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그 예를 들면, 깔끔한 맛(clean)이나 복잡미묘한 맛(complex), 상쾌한 맛(crisp), 깊은 맛(deep), 드라이한 맛(dry) 등이 그것이다. 포도주라는 음식 하나의 맛을 이렇게까지 구별한다는 것은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섬세하고 고급스러운 문화적 취향을 과시하기에는 적절해 보인다.(솔직히 수십 가지나 되는 맛의 표현들이 실제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하다.) 또, 어떤 이는 빵굽는 냄새에서 특정 지역을 떠올리며 다른 빵과의 섬세한 차별성을 끌어내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브랜드는 바로 이런 섬세한 취향을 과시하고 싶은 욕구를 비집고 침투한다. 그리고 상품은, 결국, 이러한 욕구를 표현하는 매개가 된다. 그런 상품으로는 역시 커피가 대표적이다. 누군가 스타벅스 커피를 마신다면, 그것은 필수불가결한 생리적 욕구 때문이 아니라, 보스턴(Boston)의 이지적인 과학자들이 이국적인 향취를 즐기는 풍경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욕구 때문일지도 모른다.

조직되는 현실
커피와 브랜드에 대한 이야기에 이어 나는 최면술과 감각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물론, 나는 최면술에 대해어떤 과학적인 근거를 알고 있지는 않다. 최면술은 명절 TV쇼에서 마술이나 서커스와 더불어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다. 놀랍게도 최면에 걸린 사람은 취면술사의 암시에 따라 반응하고 때로는 초인적인 능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당신의 손이 지금 뜨거운 난로 위에 놓여 있습니다"라고 암시를 주면, 최면에 걸린 사람은 금새 뜨거워서 어쩔 줄 모르는 반응을 보인다.

최면술 쇼를 보면서 새삼 생각나는 것은 현실을 조직하는 것은 감각이 아니라 뇌라는 것이다. 우리는 감각기관을 통해 외부 현실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믿고 있지만, 감각이 제공하는 것은 단초적인 것일 뿐, 현실 자체는 아니다. 그리고 감각은 쉽게 조작되거나 오류를 일으킨다. 그래서 우리는 믿는 것 혹은, 이미 익숙한 것을 보려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무엇인가를 보는 능력도 생득적인 것은 아니다. 이 얘기를 하기 위해서 우선, 시지각이라는 물리적인 기능과 인지(認知)라는 사고과정을 분리할 필요가 있다. 둘 다 본다라는 행위와 연관돼 있지만, 지각된 모든 것을 인지하는 것은 아니다. 놀랍게도 본다는 능력은 학습과 훈련을 통해 습득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이 말은 문화적 차이에 따라 같은 대상이라도 서로 다르게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역사학자(George Kubler)가 사진과 관련해서 경험했던 일화는 이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페루의 한 양치기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서 그에게 보여주었다. 물론, 그 양치기 원주민은 사진이라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러자 양치기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에게는 그저 얼룩이 진 종이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 역사학자는 그의 저서에서 이 경험을 이렇게 적었다.

 

“내가 그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서 보여주었을 때이다... 우리들은 어려움 없이 2차원의 평면을 3차원으로 전환하여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이러한 복잡한 습성을 갖추지 못한 그는 자신의 모습으로 볼 수도 있는 그 얼룩얼룩한 종이를 납득하지 못했다.” 2)

 

다의적 기억과 현실

어느덧 이야기는 영화 셔터아일랜드(Shutter Island)’로 넘어갔다. 이 영화를 볼 때,사실 네 살짜리 딸아이 때문에 영화에 집중할 수 없었다. 부산을 떠는 딸아이를 달래느라 뜨문뜨문 영화를 볼 수밖에 없었지만, 그때 그때 몰입을 끌어낼 만큼 인상적인 내용이었다. 내용을 세세하게 기억할 수는 없어 인터넷에 올라온 감상평을 살펴보니 죄의식이 빚어낸 처참한 악몽이라는 글귀가 보인다. 악몽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주인공의 경험을 현실이 아닌 환각으로 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환각으로만 보는 의견과는 다른 관점에서 영화를 이해하고 있다. 나는 이 영화가 ‘현실과 환각의 경계’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배우들의 제스처와 대사, 그리고 모든 장면 장면의 의미가 다중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겉면과 안을 구분할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아나모르포즈(anamorphose)3)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의미의 다중성은 영화의 스토리가 주인공의 정신분열을 그린 것인지 아니면, 그가 정말 교묘한 함정에 빠진 것인지 혼란스럽게 만드는 장치이다. 두 현실이 교차하는 중심에는 레이첼이라는 존재가 있다. 한쪽 현실에서 레이첼은 자식을 익사시킨 정신병자이자 악명 높은 셔터아일랜드에서 사라진 문제의 인물이다. 또 다른 현실에서 그녀는 셔터아일랜드의 실체를 알고 있는 의사이고, 그곳을 탈출해 진실을 알리기 위해 목숨을 건 모험을 하고 있다. 주인공의 현실은 레이첼이라는 꼭지점을 중심으로 두 개의 현실이 겹쳐진다.


내가 이 영화에서 주목하는 또 다른 부분은 ‘기억의 조작 가능성’이다. 두 현실 가운데 어떤 것을 받아들이더라도 기억의 조작 가능성이 열려 있기 때문에 그럴듯한 설명이 가능하다. 이것은 앞서 에디터들과 나누었던 대화의 내용과도 맞닿아 있다. 감각은 쉽게 속거나 오류를 범한다. 그리고 불안정한 감각 정보를 바탕으로 뇌는 현실을 조직해 낸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현실이란 손끝에서 부서져 흩날리는 재처럼 가볍고 약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관계를 형성하고 각자의 현실을 공유하고자 하는 것은 좀 더 견고한 존재감을 얻기 위한 본능적인 노력일지도 모른다.


두 개의 현실 사이를 방황하는 셔터아일랜드의 주인공의 모습에서 바로 우리의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과거-기억된 과거-현재로 이어지는 주인공의 현실은 기억의 조각들이 꼬이면서 혼란스러운 미로가 되고 만다. 그것은 시뮬라크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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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카이호 히로유키 외 2명 『인터페이스란 무엇인가』박영목, 이동연 번역 1998.9

2) George A. Kubler 『The shape of Time: Remarks on the history of things』 『Art in Context』(Jack A. Hobbs저)'에서 재인용

3) 곡선으로 휘어진 거울이 현실을 그로데스크한 모습으로 변형하는 것처럼, 현실의 외양을 기괴하게 변형하는 환성적인 기술 또는, 마술과 같은 것이다. 원근법과는 대응점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원근법이 수학적 질서와 합리주의를 나타낸다면, 아나모르포즈는 그 대척에서 뒤틀리고 다의적인 성격, 순환, 타원형적 시각 등을 나타낸다.


2010년 3월 22일 월요일

4월 월간 w.e.b. 에디터 노트

웹을 바꾼 열두 가지 역사에 대한 변

목회를 하고 있는 한 친구는 미국 애리조나 주(Arizona州)에 위치한 호피인디언 보호구역(Reservation, 보호구역이라 번역되지만, 그 친구는 ‘강제 지정 거주 지역’이라고 해야 옳다고 한다.)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 그 친구를 오지로 떠나 보내며, 절망과 피해의식으로 병들어버린 그들에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궁금했다.

최근, 그가 가장 전념했던 일은 정원을 가꾸는 일이었다. 즉, 사막에 꽃을 심는 일. 황량한 사막에서 무언가를 피워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분명 그들에게는 새롭고 놀라운 경험일 것이다. 그 경험은 얼음장처럼 단단한 그들의 절망에 조금씩 균열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식물이 뿌리를 내리듯, 균열을 비집고 그들에게도 희망이 피어날 것이다.

친구는 또, 그들의 언어와 역사를 복원하고 싶다고 했다. 자신의 언어와 역사를 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감히 짐작하건대, 그것은 나를 발견하고 이해하기 위한 여정이 될 것이고, 현실을 보는 눈이 될 것이다. 절망이라는 현실을 이해할 때, 비로소 그 위에 새로운 역사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주제 넘은 짓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웹이라는 한 분야에 국한된 역사이기는 하지만, 월간지에서 다루기에는 너무 묵직한 주제가 아니었을까? ‘역사’라는 거창한 개념보다는 소박하게 ‘이야기’ 정도로 했어야 하지는 않았을까? 이번 특집을 준비하면서 내내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용기를 내기로 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너무 ‘새로운 것’에만 매몰되어 우리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문제의식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최소한 우리가 IT 산업 속에서 나누는 담론을 소통하기 위한 노력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번 호에서 만족할만한 수준으로 웹의 역사를 담아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객관적이다라고 단언할 수도 없다. 이것으로 ‘웹의 역사’를 정리했다기보다는 하나의 의제를 던지는 정도에 머무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자신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이제 우리의 현실을 이해하고 새로운 역사를 준비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완벽한 '객관'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게 가능하다면, 이렇게까지 좌충우돌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객관은 허상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허상을 만드는 것은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곳에 존재하는 헤게모니일 것이다. 누군가는 헤게모니를 잡고 ‘객관’을 이끌기도 할 것이고, 또 누군가는 주변을 서성이며 객관의 허구성을 공격할 것이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나름의 입장을 세우는 일은 역사를 내면화하는 일이다. 역사를 내면화하는 일이란 공론화된 객관을 받아들이는 일이기도 하다. 다시, 이 객관을 허물고 새로운 객관을 세우는 일, 이것이 곧 담론을 형성해나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좀 더 이해하게 될 것이다.



역사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를, 나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다. 단단하고 팽배한 의식에 균열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균열의 틈새에서 창조의 가능성을 발견하기 위한 것이다. 과거에 대한 통찰을 통해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만들어 가는 일. 그것이 역사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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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웹이 이땅에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어떤 과정으로 변화해 왔는지를 살펴본 작업이었다. 이제 비로소 조금은 알 것 같다. 웹이 무엇인지.
인터넷이 군사적 용도로 개발된 기술이라는 점과는 달리 웹은 태생부터 개방과 참여, 공유를 위한 것이었다. 웹이 산업기술의 한 축으로 자리 잡으면서 자본의 요구에 의해 진화돼 왔지만, 여전히 웹의 탄생을 지켜보았던 이들은 웹이 생득하고 있는 철학에 주목하고 있다.
웹 산업의 중심에서 활동하는 저널리스트였지만, 나는 1년 6개월이라는 시간을 보내고 이제야 어렴풋이 웹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막 웹을 알기 시작했는데, 나는 웹 저널리스트라는 직업을 떠나야 한다. '잠시'라는 유보적인 단어를 쓰고 싶지만, 그것이 분명한 계획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냥 '떠난다'라고만 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저널리스트라는 자의식을 놓고 싶지는 않다.
이것은 단지 전통적인 매체를 떠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매체가 십수년 쌓아온 아우라를 내려놓는 것일 뿐이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더 낮아질 것이고, 더 예리해질 것이다. 그리고 더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리고 비로소 저널리스트가 되어 갈 것이다.

2010년 3월 19일 금요일

트위터에 대한 단상

가장 빠른 미디어, 네티즌

2009년 1월 어느 새벽, 150명을 실은 US항공 소속 비행기가 엔진에 새가 충돌하는 사고로 허드슨강에 비상착륙을 했다. 초대형 참사가 일어날 뻔한 상황에서 체슬린 설렌버거 기장이 놀라운 판단력과 조종술을 발휘하면서 전원이 무사히 구조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 사건은 ‘허드슨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며 전세계 수많은 언론매체로부터 회자되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놀라운 점은 또 하나 있다. 언론에 보도되기 전, 이 사건이 전세계에 알려지게 된 것은 트위터(twitter.com)라고 하는 SNS(Social Networking Service)로 인해서다. 사고발생직후, 현장에 도착한 재니스(Janis Krums)라는 구조대원이 아이폰으로 사진을 찍어 인터넷에 올리고, 트위터에 짧은 글을 남겼다. 그러자 사고소식은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이 사진은 스마트폰과 SNS가 가져올 혁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그림1 허드슨강에 비상착륙한 비행기 승객 구조장면 출처: http://twitpic.com/135xa)

트위터의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단문 블로그’ 형식의 SNS들이 여기저기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NHN의 ‘미투데이(me2day.net)’, 다음의 ‘요즘(yozm.daum.net)’, 그리고 SK컴즈의 ‘커넥팅’ 등 국내의 주요 포털이 만든 단문 블로그 외에도 스타플(starpl.com)이나 런파이프(www.runpipe.com) 등 매우 다양한 서비스들이 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단문블로그에 열광하는 것일까?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트위터가 갖고 있는 몇 가지 중요한 특성을 느슨한 결합(Loose Coupling)과 ‘작은 세상 네트워크(small world network)’, 그리고 ‘실시간(real time)’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스마트폰이라는 변혁이 자리하고 있다.

느슨한 결합
느슨한 결합(Loose Coupling)은 컴퓨터 공학에서 사용되던 개념이다. 이것은 미시간대학의 조직학자 칼 바이크(Karl Weick)에 의해 유연하게 다른 여지를 수용할 수 있는 관계를 설명하는 사회학 이론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어떤 사안에 대해서 매우 구체적이고 정교하게 정의된 프로세스는 또 다른 가능성을 수용할 수 있는 여지가 없기 때문에 폐쇄적인 속성을 지닌다. 하지만, 느슨한 관계에서는 수많은 변수들을 유연하게 수용하기 때문에 창의적으로 일을 수행할 수 있다.1

우리에게 익숙한 싸이월드(www.cyworld.com)나 카페 등을 떠올려보자. 이곳에서는 사용자 사이에 비교적 폐쇄적이고 견고한 관계가 형성된다. 주로 지인이나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이들이 관계를 형성한다. 카페의 일원이 되거나 일촌이 되기 위해서는 ‘허락’이 필요하다. 게다가 커뮤니티의 성격과 맞지 않는 행동을 할 경우에는 ‘강퇴’라는 엄격한 퇴출조치를 받게 된다. 미학자이자 시사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진중권 씨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것은 ‘촌락공동체’ 생활방식이 잔재하는 ‘구술문화’적 특성을 갖고 있다. 그래서 다분히 친교적인 커뮤니티 성격을 갖는다. 2

이와는 달리 트위터에서 사용자와 사용자의 관계는 팔로우(follow)라는 방식에 의해서 이루어지며 개인주의적이고 느슨한 결합의 특성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연결고리의 형성이 매우 자유분방하고 특정 커뮤니티에 소속되었을 때 감수해야 하는 부담감이 없다. 그리고 느슨한 결합의 유연성은 작은세상 네트워크 효과와 관계의 불확정성을 증폭하게 된다. 이것은 사용자가 예상치 못했던 의외의 연결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관계가 사용자에게 창의적인 소통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작은 세상 효과
‘작은 세상 네트워크’이론은 던컨 와츠(Duncan Watts)와 그의 지도교수 스티브 스트로가츠(Steven Strogatz)가 저술한 『작은 세상 네트워크의 집합적 역학』이라는 논문을 네이처지에 발표하면서 알려졌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일정한 수의 구성원이 있는 네트워크가 있다고 가정했을 때, 잘 짜인 구조(Regular Network)에서는 수십 단계를 거쳐야 다른 그룹의 사람과 연결될 수 있다. 그러나 잘 짜인 구조에서 벗어나 무작위로 다른 그룹에 닿은 연결이 몇 가닥만 있어도 평균적인 연결단계가 10분의 1로 줄어들 수 있다. 우리의 뇌 역시 작은 세상 네트워크로 이루어져 있다. 일정한 역할을 하는 뇌세포가 특정한 위치에 군집을 이루고 있지만, 무작위로 다른 곳과 연결된 뇌세포들에 의해 정보를 쉽게 확산시킴으로써 뇌구조의 효율성을 극대화한다. 3

느슨한 결합으로 이루어진 트위터러(twitterer: 트위터 사용자)들의 관계는 ‘작은 세상 효과’를 만들어낸다. 대개 사용자들은 자신을 팔로우하고 있는 사용자들이 누구인지 일일이 확인하고 관리하지 않는다. 그 가운데에는 의외의 인물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트위터에서 이루어지는 정보의 확산은 가히 파괴적인 수준이다. 무작위로 연결된 불특정 네트워크에서 의해 RT(retwiter)되는 정보는 무서운 속도로 전파된다.

실시간
트위터에서 정보가 확산되는 방식은 실시간(real time)이다.

지난 2월 9일, 취재를 마무리하고 원고를 마감하던 중이었다. 오후 6시 10분경을 지나고 있을 무렵, 뭔가 둔탁한 진동이 사무실 바닥에서 의자를 타고 느껴졌다. 예사로운 진동이 아니었다는 생각에 무슨 일인가 싶어서 습관적으로 웹 브라우저를 열었다. 점심 무렵부터 접속해 있던 트위터 웹 사이트에는 좀 전에 느꼈던 진동에 대한 멘션(mention: 트위터러의 짧은 글)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 진동은 수도권 일대에서 모두 느꼈던 것이었고, 트위터 안에서 지진발생은 이미 기정사실화 되고 있었다. 정확한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 포털 사이트에서 뉴스속보를 찾아보았지만, 여전히 그곳은 잠잠해 보였다. 처음으로 속보를 확인한 것은 지진이 발생하고 20여분이 지나서였다. ‘실시간’이 갖는 위력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이동성의 시대
트위터와 같은 단문블로그 서비스는 정보의 확산을 세계적인 규모에서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도록 하는 놀라운 경험을 제공하고 있다. 시간과 공간은 커뮤니케이션에서 더 이상 제약이 될 수 없다. 이러한 현상을 더욱 촉진하고 있는 것은 바로 스마트폰이다. 스마트폰이 갖는 의미는 ‘뛰어난 성능의 좋은 제품’이라는 수사적 표현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게임의 룰을 바꾸는 혁명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를 두고 IT 산업에서의 ‘제3의 물결’이라고 표현한다. 미래학자 엘빈토플러(Alvin Toffler)는 급속한 성장을 이룬 정보화를 농업혁명과 산업혁명 이후 인류 역사에서 제3의 물결이라고 불렀다.

다시, 정보화의 핵심인 IT산업 역시 세 단계의 급진적인 변화가 있었다. 처음 개인 컴퓨터(personal computer)의 등장이 제1의 물결이 되었고, 인터넷의 등장이 제2의 물결을 이뤘다. 그리고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기존의 컴퓨팅 방식을 바꾸고 있다. 그것의 핵심은 바로 이동성(Mobility)이다. 컴퓨터를 사용하기 위해 더 이상 특정 공간과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말 그대로, 언제 어디서나 컴퓨팅을 하고 인터넷에 연결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스마트폰이라는 훌륭한 접속도구가 있었기에 트위터와 같은 단문 블로그 서비스가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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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키피디아
2. 진중권 『호모코레아니쿠스』, 웅진 2007, 192p
3. 정재승, 『정재승의 과학 콘서트』, 동아시아 2003

2010년 3월 2일 화요일

해석자로서의 디자이너, 디자인의 본질부터 다시 보자


나는 김민수 교수에게 "곧은 소리가 핍박 받는 세상"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그가 서울대를 상대로 7년 간이나 지속했던 복직투쟁을 두고 한 말이었다. 미소로 화답하는 그의 표정에는 그런 어려움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지만, 그 사건은 세상을 하나 둘 알아가던 젊은 미술인에게는 잊지 못할 사건으로 기억된다.


그는 1998년 재임용 심사과정에서 재임용에 필요한 연구실적물의 4배인 8편의 논문을 낼 만큼 열정적인 학자의 면모를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연구실적 미달'이라는 이유로 재임용에서 탈락했었다. 이것은 서울대 사상 처음 있는 일이기도 했다. 그가 재임용에 탈락한 진짜 이유는 1996년 10월 미술대학 부설 조형연구소가 주최한 '한국현대미술교육과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1946-1960' 이라는 개교 50주년기념 학술 심포지움에서 발표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디자인/공예 교육 50년사:1946-1960"이라는 논문이 문제였다. (참조: 오마이뉴스 '재임용 탈락, 힘겨운 복직투쟁 벌이는 서울대 김민수 교수' http://tln.kr/2568)


이 연구에서 그는 미대 교수들의 친일행적을 언급했었고, 이것이 밉보여 재임용 탈락이라는 어이 없는 집단 이지메로 이어진 것이다. 당시, 인하대 미술교육과에 재직 중이던 성완경 교수는 '서울 미대 품성론'이라는 글을 통해 동료 교수들의 침묵에 대해서 비판하기도 했었다. 성 교수는 "사회 통념에 비추어 보아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종가집 모범생들의 몸에 밴 기율이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게 한 것"이라고 일갈하기도 했다.


그의 곧은 소리는 그의 저서들을 통해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본질을 잃고 허황된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디자인계를 위해 비판을 서슴치 않았다. 모두가 디자인을 지식경제 시대를 이끌어갈 고부가가치 산업 즉, 돈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던 시절, 김민수 교수는 ‘21세기 디자인 문화 탐사(1997, 솔 출판사)’라는 디자인 비평서를 통해 디자인이 삶의 문화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며 또한, 그러한 삶을 생성하는 활동이라는 점을 지적했었다. 그리고 지금에 대해 "디자인이 삶과 행동을 조직하는 능력에 대해 홍보하는 시대가 아니라, 오히려 디자인이심각하게 오남용되고 있는 시대에 우리의 삶에 디자인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때"라고 주장하고 있다.


나는 최근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UX에 대해서 그는 과연 어떤 생각을 갖고 있지 궁금했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물어보고 싶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디자인에 있어서 사용자 경험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김 교수는 "어떤 의미에서 트렌드에 종속된 말 만들기 차원의 유행어처럼 인식되고 있는 감이 없지 않다"며 다소 비판적인 견해를 보여주었다.

 

"나는 사용자 경험이란 말이 새로운 개념이라 여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물리적이고 비물리적인 디자인 대상이 사람과 상호작용하기 위해 마땅히 기본적으로 전제되어야 할 기본 개념이기 때문이다. 사용자 경험이 대두되게 된 것이, 디자인이 그만큼 사람들의 경험세계에 대한 인지환경이라든지 이런 것을 놓치고 있었던 것을 방증하는 것을 용어에 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예컨대 사용자 경험이란 공간, 사물, 이미지 내지는 어떤 시스템에 대해 상호작용하는 인간의 인지적 교감 영역에서 발생한다. 한데, 유사 이래로 이러한 교감 없이 인간과 사물의 관계가 형성되었던 적이 있었는가? 옛날 선사시대 이래로 인간 문화사의 역사는 각기 시대마다 그 시대의 가치관과 이데올로기에 따라 인간과 사물 사이의 교감하는 방식을 규정해 왔다.(예컨대, 그리스/로마와 중세 시대 사이에는 사물과 이미지에 대한 교감의 성격이 다르다)"

 

이날 인터뷰에서 가장 깊은 인상을 심어준 부분은 '세련되다'의 사전적 정의와 어원을 통해 본 디자인(design)의 개념이었다.


김 교수는 '세련되다'의 사전적 의미를 나에게 물었다. 사실, 조금은 당황스러운 질문이었다. 자주 쓰는 말이지만 정작 사전적인 의미를 생각해 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우물쭈물하며 당혹해 하는 내 표정을 보며 김 교수는 설명을 이어 나갔다.


서투르거나 어색하지 않고 능숙하고 미끈하게 갈고 닦음. 깔끔하고 품위가 있음. 군더더기가 없이 잘 다듬어짐, 수양을 쌓아 인격이 원만하고 성품이나 취향이 고상하고 우아함


김 교수는 "우리가 세련되다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에 앞으로 사용자 경험뿐만 아니라 모든 디자인 문제를 풀어나가는 키워드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했다. 그 예로 그는 아이폰을 들었다.


"디자인에 있어 마치 장인이 오랜 세월 정성을 들여 정제시킨 군더더기 없는 제품인 것이다. 설익은 디자인이 아니라 농익은 정제된 미학이 담겨져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나는 세련됨이란 이런 것이라 본다. 우리는 세련되었다는 것을 겉만 번지르한 패셔너블한 디자인에서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세련됨이 무슨 말인지 모르는 무지의 소치라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세련되다'는 것은 '정제된 디자인'이다. 그리고 사용자에 대한 통찰을 얻기 위해서 디자이너가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도 매우 명쾌했다. 먼저, 사용자 중심이라는 개념에 대한 의견을 묻자 "사용자 중심이란 말은 장난"이라고 꼬집었다. 디자인의 중심에 인간이 없다면, 그것이 어떻게 디자인일 수 있는느냐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용자 중심이라는 말은 오히려, "그동안 디자인이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스스로 입증하는 말일 뿐"이라고 했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사용자 중심 디자인이 별개의 영역에서 새로 출현한 디자인 개념이 아니라고 본다. 그것은 내가 정의하고 있는 디자인의 개념, '문화적 상징의 해석과 창조'의 차원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디자인의 어원적 개념 ‘de+sign’은 라티어원 디시그라네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는 상징(sign)을 해석(de)하다/해체(de)시키다의 의미가 중첩된 말로, 기존의 인간 삶에 대한 철저한 이해과정을 통해 삶을 해석하고 새로운 상징체계를 창조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결국 디자인은 단순히 이쁜 형태와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조형적 수단을 넘어서 삶에 대한 해석이 근간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사용자에 대한 통찰은 결국 디자인 현상의 맥락을 이루는 인간 삶의 전영역에 걸친 통찰력이 근간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김 교수는 디자이너에게 해석자로서의 역할을 강조한다. 디자이너는 인문적 성찰과 사회과학적 통찰, 과학기술과 예술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바람직한 디자이너의 상은 어떤 것이냐는 마지막 질문에 필로디자인(그린비 출판사)이라는 자신의 책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인간 삶에 대한 인문적 성찰이 전제된 디자이너가 있었으면 좋겠다. 재주 많은 사람들은 많지만 감동을 주는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현혹하는 겉모습 이면에 시각문화의 진실을 꿰뚫어보고 이를 소통하는 디자이너, 또한, 상품미학의 이면에 존재하는 왜곡된 사회와 역사 문제를 다룰 줄 아는 디자이너, 마지막으로, 전통의 힘과 치열한 예술적 혁신으로부터 삶에서 진짜 소중한 가치들을 깨닫게 하는 '문화와 디자인을 제대로 읽는 법'을 알려줄 수 있는 디자이너들이 그립다."

2010년 2월 4일 목요일

'직접성'과 '인간'이라는 키워드에 대해서

지난 1월 월간 w.e.b. editor's note를 통해 앞으로 주목할 키워드로 '직접성'과 '인간'을 소개한 바 있다. 직접성이라는 것은 미디어에 대해서 새롭게 제기하는 문제는 아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미디어의 속성에 대해 단순히 메시지(message)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마사지(massage)처럼 인간에게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라는 통찰이 있었다.

'실감형 콘텐츠'의 발달과정을 보더라도 미디어라는 매개는 점점 희미해지고 직접적인 체험을 구체적으로 재현하는 방향으로 이어져왔다. 즉,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 콘텐츠를 경험하면서 미디어 자체를 의식하지 않는 실감나는 경험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실시간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것은 매우 직접적인 효과를 느끼게 한다. 시간과 공간의 한계가 없이 직접적으로 이어지는 관계를 디지털 매개를 통해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직접성과 인간이라는 키워드는 바로 이러한 질문에서 비롯된다. 디지털 매개를 통해 얻게 되는 경험과 관계는 정말 진실한 것인가? 이것은 인류에게 진보적인 것인가? 성찰이 없는 열광은 비극적인 역사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과학기술이 그랬고, 파시즘이 그런 것이었다.


<2010년 1월 editor's note>

작년 말, 시판 열흘 만에 10만 명에 가까운 가입자수를 기록한 아이폰이 국내 통신시장에 폭풍을 일으키고 있다. 아이폰에 대한 소비자들의 관심이 제품 자체에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아이폰을 비롯한 스마트폰의 이동성(Mobility)은 앞으로도 컴퓨터나 인터넷서비스를 이용하는 방식에 큰 변화를 일으킬 것이다. 그런데, 아이폰에 대한 열기가 채 식기도 전에 전문가들은 또 다른 스마트폰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중략>

이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이동성과 사회성은 더욱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그 모습에 대해 월간 w.e.b.에서 제시할 수 있는 키워드는 ‘직접성(直接性, immediacy)’이다. 그리고 직접성과 관련하여 2010년에 월간 w.e.b.이 주목하고자 하는 주제는 ‘인간’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보편적인 개념으로서의 ‘인간’보다는 ‘나’와 ‘너’ 그리고 ‘그’로 지칭되는 ‘우리’가 될 것이다. 왜 사람을 주목해야 하는 것일까? 짧은 시간 동안 웹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기술 자체가 목적이 이었다. 기술의 진보는 이미 우리의 생활을 넘어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쓸모 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 그리고 그 기술이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도구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제 사람과 우리의 삶, 그 속에서의 웹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결국 모든 기술은 인간을 위한 것이다. 치열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많은 첨단 기술이 동원되고 있지만, 아무리 뛰어난 기술이라 하더라도 사람에게 이롭지 않으면 불필요한 기술이다. 사용자 중심 디자인, UI, UX가 바로 사람을 중심에 두고 문제를 해결하자는 방법론이지 않은가.

그리고, 미디어 기술은 사람에 대해 직접적인 영향력을 키우기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좀 더 실감나는 것'의 다른 말은 ‘좀 더 직접적인 것’이라 바꿔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극히 개인화된 서비스 역시 ‘직접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필요로 한다. 탠저블(Tangible) 인터페이스니, NUI(Natural User Interface)니 하는 것은 입력방식의 변화가 아니라 체험의 변화를 위한 것이다. 미디어 기술은 사람과 사회, 기기 등이 서로 얽히는 관계에서 더 직접적인 성격을 갖게 될 것이다.

또한, 모든 기술은 신체를 모방해서 만들어졌다. 하지만, 다시 그 기술은 신체의 기능을 확장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우리가 다루는 도구는 신체기관의 확장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예를 들어, 망치나 펀치는 손, 휴대전화는 귀, 카메라나 모니터는 눈의 확장이다. 그리고 이런 도구는 여전히 신체기관을 닮기 위해 진화하고 있다. 인간이 만든 도구는 모두 인간에게는 유의미한 것이고, 이것은 인간에 대한 연구를 필요로 한다.

한편, 기술은 불확정성을 없애기 위해 만들어지고 발전해 왔다. 컴퓨터가 ‘연산장치’를 의미한다는 점을 보아도 그렇다. 하지만, 컴퓨터는 불확정성을 없애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불확정성을 소통’하는 도구로서 발전하고 있다. 이것은 컴퓨터가 창의와 소통의 도구로 발전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정보통신 기술은 불확정성을 극복하기 위한 도구에서 불확정성이 만들어내는 차이와 다양성을 소통하는 것으로 발전할 것이다.

<후략>

'시맨틱웹 시대의 정보플랫폼 UX 디자인 세미나' 소개 기사

출처 i.M.a.g.e. :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웹진 |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원문 http://blog.naver.com/1220im/50081065696

서울자인센터 주최 ‘시맨틱웹 시대의 정보플랫폼 UX 디자인’ 세미나가 지난해 12월 28일, 코엑스 컨퍼런스룸에서 열렸다. 이날 세미나에는 차세대 웹 트렌드를 이끌어 갈 시맨틱웹에 대한 소개와 함께, 시맨틱웹과 관련된 서비스와 향후 지향점에 대해 정보를 나누는 자리를 가졌다.


<중략>

UX 디자인의 지향점, 인간과 디지털 기술의 궁극적인 융합

주최측의 발표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시맨틱웹 주제에 대한 세미나가 진행됐다. ‘웹 트렌드와 UX’라는 주제로 강창대 월간 w.e.b. 편집장이 발표했다. 강 편집장은 지난 2009년 웹 트렌드의 주요 키워드를 이동성과 사회성으로 꼽고 이에 따른 최신 기술과 사례를 발표하며, 2010년 웹 시장을 전망했다.


강 편집장의 발표에 따르면, 사회성 관점에서 웹 트렌드를 볼 때 트위터, 마이스페이스 등으로 SNS(Social Network Service)가 이슈화됐고, 구글과 파란, 다음, 싸이월드간 API(프로그래머를 위한 운영체제나 프로그램의 인터페이스)를 공유함으로써 인터넷 업체간 개방 사회(Open Social)가 구현됐다. 개방형 컴퓨팅 방식의 하나인 클라우드 컴퓨팅은 오피스 프로그램, 디자인 프로그램 등 별도로 다운로드 받지 않고 웹 상에서 바로 이용하는 것을 뜻하는 데, 일례로 워드와 엑셀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구글 Docs’가 그것이다. 클라우딩 컴퓨팅은 여러 컴퓨팅에 사용하지 않는 자원을 모아 데이터 용량과 트래픽 조절 등에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다는 점만 봐도 장점이 많다.


구글 안드로이드 운영체제와 애플 앱스토어는 개방 플랫폼 역할을 하며 수많은 IT 생태계를 생성하고 있다. 강 편집장은 “앱스토어는 온라인 마켓이지만 개발 플랫폼 역할을 하고 있어 개발자들의 경쟁이 IT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고 말했다.


이동성 관점에서 웹 트렌드를 살펴보면, 아이폰의 출시로 스마트폰 시장이 탄력받고 있으며 PMP, 넷북과 같은 휴대 단말 기기의 사용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 강 편집장은 “사회성과 이동성이 결합되어 실시간 컴퓨팅과 인터넷 서비스의 진입장벽이 점차 축소될 것입니다. 이런 서비스의 형태는 좀더 실감나는 것, 나를 이해하는 것, 직관적인 것, 만질 수 있는 자연스러운 것이어야 해요. 일례로 증강현실, 홀로그램 활용, 터치폰 등 서비스 형태가 점차 다양해지겠죠. 그 중에서 무엇보다도 2010년 주목해야 할 핵심은 바로 인간입니다. 이로 인해 향후 UX 디자인은 기기와 사용자의 경계가 느껴지지 않는 방향으로 진행하며, 인간 중심의 디자인이 더욱 강조될 것입니다”라며, 자신의 순서를 마무리했다.


<후략>